남성천 제일성결교회 담임목사
오늘은 교회를 이루는 물적 구성요소인 ‘교회재정’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교회 재정은 헌금이 기반이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해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마저도 오해하는 것이 있다. 헌금생활이란 헌금을 내는 것만을 말한다는 오해다. 헌금생활은 두 축을 가지고 있다. 헌금을 내는 것과 사용하는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교회가 재정으로 진짜 문제가 일어날 때는 거의 대부분 헌금을 내는 것 때문이 아니라, 헌금을 사용하는 것 때문이다. 느헤미야 13장 10-11절. 헌금과 헌물들이 원래 쓰여야 하는대로 쓰이지 않는 것을 느헤미야가 알게된다. 지도자들/관리자들을 불러, “하나님의 전이 어찌하여 버린 바 되었느냐” 꾸짖는다. 하나님은, 성전의 재정이 쓰여져야 할 바대로 쓰이지 못할 때, ‘하나님의 전이 버린바 되었다’ 하신다.
그럼 성도로서 교회 재정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가?
첫째, 교회재정의 목적을 효과적인 복음전파에 두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자비량 선교. 그러니까, 자기가 직접 일해서 번 돈으로 복음을 전했다. 이걸 근거로, “교회재정만 의지하는 교역자들, 너무 한심한 것 아니냐?” 하는 소리가 있다. 왜 이런 소리가 나오게 되는지 교역자들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리에는 무지도 있고,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측면도 있다.
초대교회 모든 사도들이 자비량을 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당시에는 복음에 대한 얘기를 듣는 측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숙식과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었다. 그럼 바울은 왜 그랬는가? 자기의 경우에는 자비량을 하는 게 복음전파에 더 효과적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여느 사도들은, 성도들이 재정을 부담해주면, 복음전파에만 집중해서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고, 하지만 바울은, 성도들에게 재정적인 부담을 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차라리 복음전파에 더 효과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자비량이든 아니든 그 핵심은 ‘복음전파의 효율성’에 있는 것이지, 재정 그 자체의 사용 유무는 아닌 것이다.
교회재정의 굳건한 목표는 복음전파에 있다. 이것이 교역자 사례비의 본질이고, 교회가 재정을 설계할 때 늘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이다. 복음전파를 위해서 성도들은 재정의 부담을 기꺼이 질 필요도 있는 것이고, 교역자들은 자신들의 사례비를 내려놓아야 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이 기준을 잃으면, 그 때부터는 교회에서, 헌금재정으로 인해 갈등과 다툼이 생기게 된다. 주님의 재정이, 주님의 복음을 위해 온전히 쓰이도록 기도해야 한다.
둘째, 교회재정이 성도 헌신의 증거품임을 기억해야 한다. 내가 속해 있는 교단은 집사.안수집사.권사.장로의 모든 자격조건에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기본으로 두고 있다. 왜 하필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모든 직분자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 둘까? 생각해 보면, ‘헌신’이라고 할 때, 이 ‘헌신’은 늘 시간과 재정의 사용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주일성수는 시간과 관련한 헌신이고, 십일조는 재정과 관련한 헌신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헌신’했다. 그가 복음을 위해 자기의 시간과 재정을 사용한 것을 보고 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헌신’한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자기의 시간과 재정을 기꺼이 사용하는 것을 보고 안다. 우리가 헌신하는 모든 것들에는, 우리의 시간과 재정이 들어가 있다.
교역자는 자기가 받는 사례비에 성도들의 눈물/서러움이 녹아 있다는 것을, 하지만 이런 삶에 낙망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헌신의 제단에 바친 것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이 사실을 깊이 기억하는 교역자일수록, 성도들이 헌신의 증명으로 바친 헌금이 정말 주님을 위해 쓰이고 있는지, 혹 주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명목으로 지출되는 부분이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으로 살펴보게 된다. 헌금은 목사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게 하는 것도 아니다. 주님께 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도들이 주님께 드린 헌금을 대리 집행하는 종에 불과하다. 교회의 재정집행은 늘 주님의 주권 아래 놓여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