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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하는 존재

글: 이준우 밸리커뮤니티교회 담임목사

토마스 칼라일은 “인간은 희망에 기초를 두고 있는 존재다”라고 했습니다. 철학에서 인간을 정의할 때, ‘희망하는 존재’ (호모 에스페란스, Homo esperans)라고 합니다.
희망하는 존재라는 것은 지금은 절망과 불안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절망은 희망과는 짝꿍입니다.
현대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불안입니다. 불안은 두려움과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두려움은 두렵게 하는 대상이 있고, 두렵게 하는 사건이나 환경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안은 불안하게 하는 구체적인 대상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막연하게 불안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불안은 인간의 자유와 한계가 마주하면서 생겨나는 현기증” 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할 마음도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한계를 보면서 현기증을 느낍니다. 그것이 불안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잘 살고 평화로운 나라중 하나는 스웨덴 입니다. 스웨덴의 어느 마을에는 지난 10년째 아무런 사건, 사고도 없었습니다.
경찰이 필요 없습니다. 사회 복지 시설도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지상 낙원 같은 곳에 살면서 자살률은 세계에서 최고입니다. 모든 것이 풍부하고, 평화로운데 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나요? 세상이 해결해줄 수 없는 마음의 불안 때문입니다.
시편 42편에서 시인은 이런 불안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인간이기에 이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런 불안감은 시편 곳곳에서 토로하고 있습니다. 파도타기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집채만한 파도 사이를 뚫고 멋있게 나아갑니다.
파도는 무섭습니다. 그런데 서핑 보드를 타고 파도 속으로 들어가면 자신의 기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시편 42편은 파도가 휘몰아 칠 때에 맨몸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의 헷세드(사랑)의 서핑 보드를 타고 들어가면 파도를 즐길 수 있다고 합니다.
에머슨 (Ralph Waldo Emerson, 1803- 1882)은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하는 것보다, 내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인생에 파도는 수시로 몰려옵니다.
주님이 보내신 파도라면 함몰하기 위함이 아니라, 일어서기 위함입니다. 헷세드의 서핑 보드를 타고 파도 사이를 헤쳐 나가면 됩니다.
큰 파도를 보면서 넘어지지 말고,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 속에서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5)
시인의 불안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서 해소되기 시작합니다. 파도에 함몰되지 않고 헷세드의 서핑 보드로 파도타기를 하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서핑을 하다보면 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넘어져도 상관없습니다. 일어나서 다시 타면 됩니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많은 경우 성공한 사람들은 언제나 성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 번의 실패에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는 사람입니다.
소망을 잃지 않고 나아가면 인생이 파도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있을 평안과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