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우 밸리커뮤니티교회 담임목사
1960년대 미국 버지니아 주는 “흑인은 테니스를 칠 수 없다”는 것을 법으로 정해 놓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버지니아주 출신 흑인 아서 애쉬(Arthur Ashe 1943 - 1993)는 1963년 UCLA에 테니스 장학금을 받고 입학합니다. 그리고 미국 남자테니스 국가대표로 발탁되면서 ‘흑인 금지 규정’을 실력으로 넘어선 사람입니다.
아서가 흑인으로 테니스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테니스 코트가 있는 공원 관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과 시대의 상황이 있었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훈련을 했으며, 68년 US오픈, 70년 호주오픈, 75년에 윔블던 대회를 우승한 최초의 흑인 선수가 됩니다.
1968년은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해 흑인들의 대규모 폭동이 있었던 때입니다. 흑백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때에 그는 미국 최고 권위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그해 세계 랭킹 1위가 됩니다. 그 후 세계 테니스 대회를 휩쓰는 선수가 됩니다. 1979년 아서 애쉬는 심장 질환으로 은퇴를 하게 됩니다. 은퇴한 이후에도 방송 해설자, 인권 운동가, 자선 사업가로 활동을 합니다. 그러던 그가 1990년에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알게 됩니다.
1983년 심장 수술할 때 수혈 받은 피를 통해 감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993년 4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의 죽음을 미국 사람들은 안타까워했고, 당시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애도를 표했습니다. 아서 애쉬의 죽음을 전하던 앵커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서 애쉬가 죽은 후 그를 기리는 공간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US오픈이 열리는 미국 내셔널 테니스센터 주 경기장의 이름을 ‘아서 애쉬 스타디움’으로 명명했습니다.
US테니스 오픈 전날은 ‘아서 애쉬 어린이 날(Arthur Ashe Kids’ Day)’ 축제가 벌어집니다. 흑인의 테니스를 금지시켰던 그의 고향 버지니아주 수도 리치먼드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1996년)
ESPN은 매년 장애자 스포츠맨의 인간 승리를 기리는 <아서 애쉬 상>을 수상합니다. 아서 애쉬가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에 전 세계의 팬들은 안타까워했습니다. 많은 팬들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어 격려했습니다. 그가 받은 편지 중 하나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당신에게 그런 나쁜 병에 걸리게 하셨나요?” 이런 편지를 보낸 것은 아서 애쉬가 에이즈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언론 보도를 듣고, 그 사람이 보낸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아서는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명의 어린이들이 테니스를 칩니다. 그 중 500만 명이 테니스를 정식으로 배웁니다. 그 중 50만 명이 직업 선수가 됩니다. 그 중 5만 명이 리그전에 참여합니다. 그 중 5천명이 그랜드 슬램 대회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 중 50명이 윔블던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 중 4명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그 중 2명만이 결승전에 갑니다. 저 홀로 윔블던 우승컵을 들었을 때, 저는 ‘하나님 왜 접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병들었다고 내가 ‘왜 접니까’라고 물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아서 애쉬의 회고록 <은총의 나날들>(Days of Grace) 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왜 접니까?” (Why me?)라는 질문을 나는 한 번도 제기한 적이 없다. 만일 내가 심장마비 혹은 AIDS에 걸린 것을 두고 ‘왜 접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라고 물어야 하고, 그것을 즐기는 제 권리에 대해서도 똑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1975년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한 날, 나는 내가 받은 축복에 대해 ‘왜 접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동일하게 나의 병듬과 고통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그는 잘되고 성공할 때만 아니라, 어렵고 병이 들었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갔습니다. 아서 애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병들었을 때에도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이런 힘은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나옵니다. 그럴 때에 누구도 나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