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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rakech, Morocco

오래전부터 마음속 어딘가에 ‘모로코’라는 이름이 머물러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이 떠진 것은 신비로운 분위기까지 스며드는 이국적인 공간에서 깊은 잠을 잘 수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호텔에서 주는 조식을 먹기 위해 옥상으로 올라가 보았다. 하늘은 맑고, 새소리는 정겹고, 공기는 신선했다. 이미 테이블에는 소박했지만 정성 가득한 아침이 조용히 준비되어 있었는데, 작고 둥근 테이블 위엔 알록달록한 모로칸 타일 식기가 놓여 있었고, 그 위로 금세 따뜻한 향기가 퍼졌다.
방금 구운 듯, 바삭한 바게트와 모로코식 전통 납작 빵 므스멘(Msemen), 겹겹이 결이 살아 있는 모로코식 전통 팬케익 바그리르(Baghrir)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곁에는 달콤한 오렌지 잼, 무화과 잼, 꿀이 담긴 작은 접시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민트 티! 잔에 붓는 순간 박하향이 훅 퍼졌고 몸을 부드럽게 깨워주었다. 직원이 조심스레 가져다준 신선한 오렌지 주스는 그 자리에서 갓 짠 듯 했고,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입안 가득히 상큼함이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은 조용하고 천천히 흘러갔다. 빵을 한 조각씩 찢어 꿀에 찍어 먹으며 아침을 여유 있게 음미하는 시간, 리야드의 조식은 배를 채우는 식사가 아니라, 모로코에서의 하루를 온전히 시작하게 해주는 작고도 깊은 환영 인사 같았다.
기분 좋게 조식을 먹고 밖으로 나왔다.
마라케시의 메디나(구시가지)의 시장, 수크(Souk)의 아침은 철문을 올리는 소리, 바닥을 쓸고 닦는 상인의 분주한 움직임, 그리고 간간이 흘러나오는 경쾌한 아랍 음악, 시장 골목은 마치 하루를 준비하는 커다란 무대 같았다.
상인들은 아직 진열을 마치지 않았지만, 그림 같은 색감은 이미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사프란과 큐민, 파프리카가 가득 담긴 향신료 더미는 노랑, 주황, 빨강의 층을 이뤄 향과 색으로 사람을 사로잡았고, 손수 짠 카펫들과 알록달록한 가죽 가방과 슬리퍼들이 벽에, 천장에, 선반 위에 가득 걸려 있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코를 자극하고, 작은 포터블 화로에서 바글거리는 타진 냄비에서는 올리브와 레몬, 향신료가 뒤섞인 따뜻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민트차를 한잔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현지인들도 있었고, “Bonjour!” 친근한 프랑스어 인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모로코는 아프리카이면서도 아랍 문화가 짙게 배어 있고, 유럽과도 가까워 수많은 문명과 문화가 교차해온 역사적 교차로다.
모로코는 오랜 세월 동안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유목민인 베르베르인, 아랍인들이 프랑스, 스페인의 영향을 받으며 독특하고도 다채로운 문화가 형성되어왔다. 유럽과 근접해서 그런지 생각했던 아프리카 느낌은 아니고 발달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유로가 많이 통용되어 있는 편이었다.
복잡한 수크의 골목을 지나 택시를 타고 도심 외곽으로 나왔다. 소음과 먼지, 향신료 냄새가 가득한 구시가지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세련된 거리로 들어서자 전혀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나타났다.


마라케시에 있는 ‘이브 생 로랑 뮤지엄(Musse Yves Saint Laurent-Marrakech)’을 방문하기 위해 미리 예약했는데도 사람이 많아 시간대 별로 예약한 대기 줄에서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야했다.
주변을 돌아보니 모로코가 아니라 서방의 휴양지를 온 듯했다. 건물들은 고급 진 샵들과 세련된 건물에 들어선 카페와 레스토랑 등 관광지에서 볼 수 있는 옷차림의 사람들과 여유 있는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얼마 후 차례가 되어 이브 생 로랑 뮤지엄 입구에 들어서자, 고요하고 절제된 공간 속에 천천히 감정이 정돈되기 시작했다. 모래 빛과 테라코타 컬러로 물든 건물 외관은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루며, 마치 한 벌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보는 듯했다. 전시는 단순한 옷의 나열이 아니었다. 이브 생 로랑의 스케치, 패브릭, 영감의 원천이 된 아프리카 예술품, 그리고 마라케시에서 받은 빛과 색의 영향이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졌다.
어둡게 조명된 전시장 안에는 그의 대표적인 컬렉션이 전시되어 있었고, 드레스 하나하나가 예술 작품처럼 빛을 머금고 서 있었다. 특히 마음을 빼앗긴 건, 생 로랑이 평생 수집한 영감의 이미지들이 모인 ‘무드보드’ 공간. 자연, 미술, 사람,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그 기록은 그가 옷을 만드는 사람을 넘어서, 삶을 예술처럼 바라보던 시선의 소유자였음을 말해주었다.
뮤지엄 옆에는 자크 마조렐(Jacques Majorelle) 정원이 있었다. 이브 생 로랑의 맨션으로도 많이 알려진 자크 마조렐에 대해 알고 보면 더욱 흥미롭게 마조렐 정원을 느껴 볼 수 있다.
프랑스의 화가 자크 마조렐은 오리엔탈 풍 화가로 이집트와 이슬람 문화권의 국가들의 모습들에 영감을 받은 작품들로 알려져 있는데 마조렐 정원은 자크 마조렐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모로코에 머물며 40년에 거쳐 하나의 작품을 다루듯이 정성껏 가꾸며 살았던 곳이다.
모로코 남부에서 볼 수 있는 푸른 타일에 영감을 받아 만든 쨍하고 강한 푸른색 ‘마조렐 블루’칼라가 마조렐 정원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브 생 로랑은 처음 마라케시에 도착했을 때, 이 도시에 “색이 살아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정원에 반했고, 마조렐이 세상을 떠난 후 오래된 정원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직접 구입해 지켰다. 그리고 이곳은 그의 영감의 샘이자, 결국 그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다. 진한 코발트블루 건물과 선인장, 대나무, 꽃들이 이상하리만치 강렬하게 어우러져 현실보다 꿈에 더 가까운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그곳에서 생로랑은 매일 영감을 받았고, 결국 이 도시에 자신만의 마지막 안식처를 남겼다.
이브 생 로랑 박물관 전시홀을 지나면 기념품 샵이 나오는데 전 세계 팬들이 그를 기리며 특별한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 기념품들이 판매되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조용히 생각에 잠겼는데, 젊은 시절 패션회사에서 마켓 리서치를 할 때 우연히 마주했던 이브 생 로랑의 이야기가 다시 살아난 듯, 마라케시에서 그의 세계 안에 들어가 무언가를 느끼고 나왔다는 사실이 감격이었는데 마라케시의 햇빛, 모래, 색감, 정적, 그리고 열기…그 모든 것이 그의 옷 안에 녹아 있었고, 그 숨결을 따라 걸어본 짧은 여정이 잊지 못할 감동으로 남았다.
이브 생 로랑 뮤지엄을 나오는 길가에 경쾌한 분위기에 식당에서 모로코 문양이 가득한 예쁜 그릇에 담긴 음식을 즐기고 숙소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마라케시의 시장 골목을 둘러보기 위해 무작정 걸었다. 손끝엔 향신료의 가루가, 눈동자엔 천 색깔이, 귓가엔 사람들 소음이 맴도는 듯했다.
모든 것이 넘치고 살아 있는 공간, 그 사이를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문득, 햇살이 기울고 거리의 소란도 잠잠해질 무렵, 아직 낯익지 않지만 익숙해진 길을 따라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분주한 하루를 품에 안은 채 조용한 리야드의 안뜰로 스며들었다.
현란했던 하루 끝에 찾아온 고요함…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는 여행자에서 조금 더 ‘머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